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파비 제국 (문단 편집) == 사회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afavidempireclothing.jpg|width=100%]]}}}||{{{#!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483bc1a99b348443105c62a3eb7b6f6.jpg|width=100%]]}}}|| || 로버트 셜리의 초상화[* Sir Robert Shirley(1581~1628). 영국인 탐험가이자 대사로, 총 3번에 걸쳐 페르시아에 장기 체류했고 [[아바스 1세]]의 조언자로 일하기도 했다. 특히 포병에 관심이 많던 아바스 1세의 요청으로 페르시아 포병을 영국식으로 발전시켰다. 1622년에 그려진 초상화로 일부러 페르시아 전통 복장을 입은 모습을 그렸다. 사실 그는 대사로 페르시아에 거주할때 페르시아 복장을 입고 다니며 귀국할때도 이 옷을 입고 온 터라 유럽에서는 그의 페르시아 복장을 신기하게 보았다.] || 사파비 제국 시대 여성들의 복식. || 이란 지방이 대개 그렇듯이 사파비 제국의 영토도 대부분이 사막이나 쓸모없는 불모지였다. 넓은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어봤자 태반이 제대로 쓸 수도 없는 척박한 땅이었던 것. 그래서 당시 최대 경쟁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의 인구가 1600년에 2천만 명을 돌파하며 최전성기에 3천만에 달한 것에 반해 사파비 제국의 인구는 1650년에도 여전히 8백만~1천만 사이에 머무르고 있었다.[* 한마디로 망하는 순간까지 1천만 이하였다는 소리다.] 사파비 페르시아는 [[능력주의]]를 상당히 추구하는 국가였다. 이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페르시아도 신분제 사회인 만큼 부모에게 명예와 관직을 물려받을 수 있었고 귀족 역시 존재했지만 그 명예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제 능력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지 못할 시 명예와 관직을 유지하더라도 무능하다고 사회에서 천대받기 일쑤였다.[* 사실 이는 다른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귀족들은 중요한 직책을 맡기에 그만큼 직책에 걸맞는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능력이 부족해서 가문의 배경으로 관직과 명예를 유지하면 당연히 무능하다는것이 드러나는터라 사회적으로 천대받게 되며 이는 귀족 가문의 평판을 깍아버려 정계에서 소외되게 만든다. 귀족들이 능력을 갖추려고 노력하며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쓰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반대로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최하층에서 올라갈 수 있는 것도 가능했다. 대표적으로 사파비 제국을 무너뜨린 [[나디르 샤]]부터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 장작을 주워 파는 게 유일한 수입원일 정도였다. 17세기 사파비 제국을 여행했던 프랑스 여행가 장 샤르댕은 [[페르시아인]]들이 굉장히 겸손하고 예의바른 사람들이라고 썼다. 그에 의하면 페르시아인들은 기본적으로 움직이거나 운동하는 것을 전혀 좋아하지 않으며 [[여행]] 역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여행은 새로운 경치를 보거나 경험을 하러가는 관광의 개념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어쩔 수 없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개념이었다.[* 페르시아인들이 운동을 하거나 움직이기 싫어한다는 건 서양 세계에서도 옛날부터 꽤 유명했다.] 그나마 페르시아인들이 움직일 때는 말을 타고 무기를 다룰 때였다. 가장 좋아했던 건 [[궁술]]이고 두 번째가 [[검술]]이었다. 마지막이 튀르크계 민족답게 [[승마]]였다고 한다. 사파비 제국에서 인기가 많았던 것들 중 하나가 바로 [[레슬링]]인데, 마을마다 '파라반'이라고 해서 마을을 대표하는 레슬링 선수들을 한 명씩 데리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다. 그 외에도 줄타기 곡예, 인형극, 검술 시범 등도 인기가 많았다. 외모 면에서 보자면 페르시아인들은 그 누구보다 외양을 꾸미는 데 열심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치품을 좋아했고 남자들은 심지어 여자들보다도 많은 [[반지]]들을 주렁주렁 끼고 다녔다. 뿐만 아니라 [[단검]]이나[* 왜 단검이 장식품에 들어가냐면 전근대에는 치안이 나빠서 범죄가 흔하게 발생한 터라 호신용으로 단검을 가지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신분이 높고 부유할수록 단검을 화려하게 장식하여 자신의 부와 신분을 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망토 등에 큼직한 보석을 매달아놓는 등 사치로 따지자면 그 어떠한 나라들보다도 앞서나가는 국가였다. 여성의 복식은 동시대 [[중국]]이나 [[유럽]]에 비해서 훨씬 탁 트이고 하늘하늘한 모습이었지만 이는 집에서만 입을 수 있었고 밖에 나갈 때는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커다란 망토로 덮고 나가야만 했다. 남자들의 최고 패션 아이템은 바로 [[터번]]이었다. 이틀 이상 같은 터번을 쓰는 법이 없었고 색색이 물들인 터번에 깃털, 보석, 금사슬 등 온갖 장식을 다 넣어서 꾸미고 다녔다. 의외로 여자들은 머리 모양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냥 머리를 길게 땋아 끝에 보석이나 진주 따위를 매다는 것으로 만족했다. 또한 여자 노예나 여시종들은 노예의 상징으로 왼쪽 콧구멍을 고리로 뚫어야만 했다. 물론 이는 천하다는 상징이었기 때문에 귀족 여성들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